불가사의한 삶을 살았던 화가 카라바조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 1571년 10월 29일 – 1610년 7월 18일), 이탈리아 밀라노출신의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카라바조는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카라바조는 신화나 영웅을 표현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전통을 무시하고 인물을 대담하게 표현한 카라바조의 대표적인 작품<정복자 큐피드>다. 이 작품에서 활과 화살로 사랑을 전파시키는 큐피드가 아니라 벌거벗은 실제의 소년의 모습을 묘사해 당시에 외설적인 작품으로 여겨져 파문이 일어났다.

이 작품에서 큐피드는 오른손에 화살을 쥐고 있고 바닥에는 악보와 악기 그리고 책과 펜, 월계관, 콤파스, 각도기가 놓여 있다.
악보와 악기는 음악을 상징하고 있고 책과 펜은 문학 그리고 각도기와 콤파스는 건축을 상징한다. 큐피드는 무기를 들고 지식과 권력의 상징들을 짓밟고 있다.
이 작품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카라바조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라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전원시에서 차용을 했다. 사랑은 학문과 예술을 정복한다는 의미다.
이 작품에서 큐피드의 다리의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위해 제작된 <승리>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작품을 똑같이 옮겨 놓지는 않았다. 그는 큐피드의 자세를 영웅의 모습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모습도 아닌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또 이 작품에서 바닥에 놓여져 있는 악보에 가사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메조소프라노 곡의 일부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작품을 처음 구입한 빈체초 주스티아니 후작이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카라바조는 그를 칭송하기 위해 악보와 악기를 그려 넣었다.
하지만 주스티아니 후작의 집에 있던 이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그림 위에 초록색 천으로 덮여져 있었다. 25년 후 시인 페트라르카가 호기심으로 그것을 들추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카라바조가 친구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날개 한쌍’을 돌려달라고 재촉하는 편지 덕분에 이 작품의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1602년이라고 밝혀졌다.
카라바조는 길거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서민들의 생활상을 현실감 넘치게 표현했다. 그는 그림에 처음으로 그림에 사기꾼이나 도둑을 등장시켰다. 대표적인 작품이 <점쟁이>다.
<점쟁이>는 여자 점쟁이에게 젊은 남자가 손금을 보고 있는 장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통속적인 주제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런 테마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주제였다.

이 작품에서 집시 여인은 젊은 남자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손을 잡고 있다. 부유한 남자는 여인에게 손을 맞긴 채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여인은 손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능숙한 손놀림으로 남자의 반지를 빼고 있다. 젊은 남자는 반지를 빼는 여인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 여인이 집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치마를 한쪽 어깨에 매달아 입고 있는 것으로 집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독특한 차림을 한 집시들이 행인들에게 점을 봐주고 돈을 받았다.
깃털 달린 모자와 화려한 옷차림에 귀족의 상징인 칼을 차고 있는 젊은 남자는 물질적인 부유함과 세상에 대한 자신감으로 자신감이 흐른다.
이 작품에서 집시 여인은 젊은 남자에게 두 가지를 훔친다. 운명을 점친다는 거짓말로 돈을 훔치고 그것을 미끼로 반지도 훔친다.
카라바조<1571~1610>는 이 작품에서 배경을 생략한 채 인물의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집시 여인을 불러서 그녀를 모델로 이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모델을 현장에서 찾아 그리는 방식은 다른 화가들에게 유행처럼 번졌다.
화가로서의 경력이 16년밖에 안되는 동안 카라바조는 도박과 술과 결투로 인한 살인으로 파문을 몰고 다녔다. 그가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아꼈던 후원자 델 몬테 추기경 도움 때문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