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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제문과 뒷받침문장
청산은
2005. 6. 22. 20:41
소주제문과 뒷받침문장
소주제문과 소주제
단락의 중심 문장인 소주제문은 그 단락에서 다룰 중심 문제 곧 소주제(topic)를 그 핵심 요소로 지닌다. 이것은 그 단락의 으뜸 생각으로서 모든 뒷받침문장들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구실을 한다. 뒷받침문장들은 이 소주제를 내용적으로 펼치고 떠받들도록 배열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주제를 "다스림 생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 단락의 소주제문에 나타난 소주제가 그런 다스림 생각으로서 글 전체 내용을 지배하고 있다.
[보기 1.10]
사람은 첫째로 사람에게서 배운다. 사람의 스승은 우선 사람이다. 글을 읽는 것, 간접적이긴 하나 내용에 있어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글을 배운다면 먼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에도 사람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인간 사회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많고 의의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부터 성현들이 혹은 인(仁)을 혹은 사랑을 혹은 자비를 가르쳤음은 한결같이 인간 관계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고 사람에 의하여 구실을 하게 마련이다.(박종홍, "학문의 길").
위 글의 첫 문장에 나타난 "사람으로부터의 배움"이 소주제이며 이것은 그 뒤의 모든 뒷받침문장들을 다스린다. 다시 말하면 모든 뒷받침문장은 이 소주제를 떠받들도록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소주제와 어긋나는 내용의 문장들은 거기에 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 소주제문은 그 놓이는 자리가 단락의 첫머리가 아니고 끝부분일지라도 뒷받침 문장들을 거느린다.
[보기 1.11]
멘델은 저 유명한 "유전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고작해야 수도원 뒤뜰에다 완두콩을 심어 놓고 해마다 수확되는 색깔이 다른 완두콩의 수를 헤아려 그 비율을 산출해 낸 것이다. 이건 참으로 쉽고 하찮은 일에 불과해 보이지만 인류 정신 문화의 일대 변혁을 가져오는 중대한 학문적 업적이 되었다. 멘델이 한 일들을 두고 생각해 보면 학문이란 어렵다고만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일지 "학문 공포증에서 벗어나자"--
위 글의 소주제문은 단락의 끝에 있는 밑줄 친 부분이며, 그 앞부분이 뒷받침 문장들이다.
그런데 소주제보다 앞에 나온 뒷받침 문장들이라 하더라도 한결같이 소주제문을 떠받드는 구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뒷받침문장
한 단락의 뒷받침문장은 소주제 또는 소주제문을 내용으로나 분량으로나 알맞게 펼쳐서 충실한 단락을 이루는 구실을 한다. "내용으로 알맞다"는 것은 뒷받침문장이 소주제문과 내용적으로 어긋남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분량으로 알맞다"는 것은 소주제문을 충분히 설명할 만한 수 의 문장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에서도 소주제문을 알맞게 펼친 단락을 볼 수가 있다.
[보기 1.12]
우리 사회에도 이웃 사랑의 봉사 정신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한편에는 두고두고 우리들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미담의 주인공들도 늘어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 한 푼 두 푼 모은 전 재산을 학교 발전에 써 달라고 기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사회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삭막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 한숨과 눈물로 지새는 장애자들을 찾아서 헌신적으로 돌보아 삶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노인들을 찾아서 모닥불을 짚이고 따뜻한 사랑의 봉사를 줄곧 이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이웃 사랑의 정신은 본디 종교계를 중심으로 펼쳐져 왔는데 요즈음에는 대학에서 그런 봉사 활동에 학점을 부여하여 장려하는 일도 생겨났고 언론 기관에서 그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나라도 불우한 이웃들을 돌보는 봉사 정신이 온 사회의 각광을 받으며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 김보들맘, "봉사 정신에 대하여"--
위 글의 소주제는 "봉사 정신의 생활화"이고 그것은 맨 앞에 소주제문("우리 사회에도 이웃 사랑의 봉사 정신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으로 나타나 있다. 그 뒤의 모든 문장들은 그 소주제를 펼치는 뒷받침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은 모두 그 소주제와 내용적으로 어긋남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분량 면에서도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 소주제를 잘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펼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보기 글의 뒷받침은 알맞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일 위 보기의 뒷받침문장 중에 소주제의 내용과 어긋나는 것이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보기 1.12]'
우리 사회에도 이웃 사랑의 봉사 정신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한편에는 두고 두고 우 리들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미담의 주인공들도 늘어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 한 푼 두 푼 모은 전 재산을 학교 발전에 써 달라고 기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사회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삭막한 세상을 살맛 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선진 복지국가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기주의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더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에서("그렇지만 아직도~~ 있으니 말이다.")이 무심코라도 끼어 든다면 그것은 소주제를 떠받들지 못하고 오히려 해치게 된다. 그런 문장은 소주제를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깎아 내려서 역효과를 가져오거나 혼선을 가져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소주제와 내용적으로 어긋나는 문장이 없더라도 다음과 같이 뒷받침문장의 분량이 너무 적으면 소주제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다.
[보기 1.13]
우리 사회에도 이웃 사랑의 봉사 정신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한편에는 두고 두고 우리들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미담의 주인공들도 늘어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 한 푼 두 푼 모은 전 재산을 학교 발전에 써 달라고 기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
와 같이 뒷받침문장을 두어 개 정도만 늘어 놓고 말면 소주제를 충분히 펼 쳤다고 할 수가 없다. 그 정도의 설명만 가지고는 독자가 그 소주제를 충분히 납득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뒷받침이 빈약한 단락 또는 내용이 옅은 단락이라고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