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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청산은 2009. 5. 13. 15:59

메밀꽃 필 무렵 / 이효석

 

 

애욕과 혈육에 얽힌 인간의 정과 그 신비성을 서정적인 필치로 그림

사실적인 배경 묘사는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함

전체적 진행은 대화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암시와 추리 기법이 동원됨

 

 

 

 

[줄거리]

 

드팀전의 허 생원과 조 선달이 장을 거두고 술집에 들렀을 때 벌써 먼저 온 동업의 젊은 녀석 동이가 계집을 가로채고 농탕치고 있었다. 허 생원은 괜히 화가 나서 기어코 그를 야단쳐서 쫓아내고 말았다. 장돌뱅이의 망신을 시킨다고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얼마 후 되돌아와서 허 생원의 나귀가 발광을 하고 있다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허 생원은 어이가 없었다. 얽음뱅이요 왼손잡이인 허 생원은 계집과는 인연이 멀었다. 때문에 장돌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아직 홀몸이었다. 그러므로, 자신과 늘 함께 하는 나귀의 신세가 느꺼웠던 것이다.

 

밤이 들어 허 생원은 조 선달과 동이와 함께 나귀를 몰고 다음 장으로 발을 옮겼다. 대화장으로 가기 위해서다. 달이 환히 밝았다. 달밤이면 으레, 허 생원은 젊었을 때 봉평에서 겪었던 옛일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개울가에 메밀꽃이 활짝 핀, 달 밝은 여름밤이었다고 한다. 그는 멱을 감을 양으로 옷을 벗으러 방앗간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울고 있는 성서방네 처녀를 만나서 어쩌다가 정을 맺었던 것이다. 그녀는 봉평에서 제일가는 일색이었다. 그는 오늘도 기이한 인연에 얽힌 이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동행을 하다가 허 생원은 이날 밤 동이가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난 사생아임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의 고향은 봉평이라 했다. 허 생원에게는 맺히는 것이 있었다. 동이 어머니가 제천에서 홀로 산다는 말을 듣자 그는 놀라 개울에 빠지게 된다. 이튿날 그는 동이를 따라 제천으로 가 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문득, 그는 나귀를 몰고 가는 동이의 채찍이 동이의 왼손에 잡혀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아둑시니같이 어둡던 그의 눈에도 이번만은 그것이 똑똑히 보이는 것이었다.

   

 

[등장인물]

 

● 허생원: 주인공. 가진 것 없고 못난 탓에 과거 한때의 아름다운 추억 속에서만 사는 고독한 인물. 유랑의 원형을 가진 장돌뱅이.

 

● 동이: 장돌뱅이. 젊은 혈기와 순수함을 간직한 젊은이. 허 생원의 아들로 짐작되는 인물.

 

● 조선달: 보조 인물. 허 생원의 좋은 장돌뱅이 친구.

 

  

 

[핵심정리]

 

갈래: 단편 소설, 본격 소설, 순수 소설

 

성격: 낭만적, 서정적, 묘사적, 유미적(서정적 소설→시적 소설)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표현: 순수한 우리말을 통해 토속적인 분위기를 돋구어 주고 있다.

 

행선지: 봉평→대화→제천

 

배경: 시간(1920년대 어느 여름날 낮부터 밤까지), 공간(강원도 봉평 장터와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메밀꽃이 흐드러진 밤길. 특히 공간적 배경은 과거 회상의 계기, 낭만적인 분위기 조성, 자연의 신비감을 환기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제재: 장돌뱅이의 삶

 

주제: 장돌뱅이 생활의 애환을 통한 인간 본연의 속성으로서의 애정

 

출전: <『조광』12호,1936년10월>

 

 

 

[구성단계]

 

발단 : 봉평 장터에서의 일

- 봉평 장터에서 허 생원은 조 선달과 함께 일찍 전(廛)을 거두기로 한다.

- 한산한 장터, 여름 장의 때이른 파장.

- 충줏집에서 동이를 나무라는 허생원.(동이라는 애송이 장동뱅이가 충줏댁과 수작을 하는 것을 보고 뺨을 때림)

 

전개 : 대화로 가는 길

① 파장 뒤 충주집에서 허 새원은 계집과 농탕치는 '동이'를 쫓아낸다.

② 허 생원은 다음 장터로 가는 달밤길에 사랑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 달밤에 메밀밭 옆을 지남 ( 허생원이 지난 날의 과거 회상하는 계기 )

- 허생원의 과거 로맨스 : 동이의 나이만큼이나 오래 전에 허생원은 봉평장을 보고 잠을 자려 했지만 더워서 자지 못하고, 그래서 메밀꽃이 핀 개울가 물레 방앗간으로 갔었다. 마침 달밤. 뜻밖에도 울고 있는 제천의 성서방네 딸을 만나 하룻밤 지냄. ⇒ 하나의 '삽화'로 볼 수 있음.

* '삽화'의 시간적 배경(달밤)과 공간적 배경(메밀꽃 핀 개울가)은 현재의 시간 / 공간(분위기)과 일치되는 것으로 현재와 과거가 교묘히 교차.

③ '동이' 어머니의 친정이 봉평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 동이의 내력과 어머니 이야기 : 어머니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른 채 동이를 낳았고, 그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 어떤 남자와 살다가 헤어져 지금 홀로 삶.

 

절정 : 허생원과 동이의 관계

- 동이가 자기의 자식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허생원

- 마음이 가벼워진 허생원 :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결말 : 제천으로 가겠다는 허생원

- 동이와 함께 제천으로 가자고 제안함 :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며,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 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 동이가 왼손잡이임을 알게 됨

 

 

 

[구성상의 특징]

두 개의 플롯의 교차

* 플롯 Ⅰ : 시간적 추이
          - 허생원의 평생 내력 : 유랑의 삶
* 플롯 Ⅱ : 공간적 이동
          -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의 이동 : 자연스럽고 신비스러운 혈육에 대한 정을 부각
          * 문체상의 특징 : 시적 분위기 연출, 사실적 묘사 문체
          * 서술기법상의 특징 : - 과거의 사건 : 요약적 서술 방법
                                        - 현재의 사건 : 주로 장면적 제시 방법

봉평→대화

봉평장→

봉평-대화간 산길→

도착예상 장소

드침전

충줏집

메밀밭

고개

벌판

주막

대화장

제천

 

 

 

 

[작가소개]

 

 

이효석

 

강원도 평창 출생. 호는 가산(可山). 1930년 경성제국대한 법문학부 영문학과 졸업. 세련된 언어, 풍부한 어휘, 시적 분위기의 추구 등으로 소설 문학을 시적 세계로 승화시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초기에는 도시 빈민층을 중심으로 사회적 모순의 고발, 불행한 사람의 파멸을 그려 [<도시와 유령>(1928), <노령 근해>(1930) 등] 유진오와 더불어 카프 진영으로부터 동반자 작가라는 호칭을 듣기도 하였다. 1933년 <돈(豚)>을 발표하면서 경향성을 탈피, 원시적인 자연과 인간 본능의 순수성(자연과 인간의 동화)을 서정적으로 그려[<오리온과 능금>(1932), <산>(1936), <들>(1936) 등] 심미주의 세계로 기울어진 모습을 보인다. 1940년에 상처(喪妻)를 하고 거기에 유아(乳兒)마저 잃은 뒤 극심한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왔다. 이때부터 건강을 해치고, 따라서 작품 활동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1942년 뇌막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20여일 후 36세로 요절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돈>(1933), <산>(1936), <모밀꽃 필 무렵>(1936), <분녀>(1936), <장미 병들다>(1938), 장편 <화분>(1939) 등이 있다.

 

 

 

 

[이해 및 감상 1]

 

 

이 작품은 인간 심리의 순수한 자연성을 허 생원과 나귀를 통해 표출하고 있는 낭만주의적인 소설이다. 강원도 땅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팔십 리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그 길을 가는 세 인물의 과거사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본연적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늙고 초라한 장돌뱅이 허생원이 20여년 전에 정을 통한 처녀의 아들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과정이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깨알깨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길 묘사에 젖어 들어 시적인 정취가 짙게 풍겨 나온다. 낭만성과 탐미주의 성향이 어우러진 이효석 문학의 대표작이다.

 

서정주의적 경향이 많으며 암시와 추리를 통해 주제를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대화 형식으로 플롯이 진행되며 반복되는 지명(地名)으로 의식과 감정을 고조시킨다.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많으나 파장 무렵의 시골 장터의 모습이나, 주인 허 생원을 닮은 나귀의 모습이나,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의 묘사 같은 것은 뚜렷한 사실성을 가지고 서술되었다.

 

허 생원이 동이가 친자(親子)라는 것을 확인한 후의 모든 기쁨은 독자의 상상력에 유보되어 있다. 물론, 확인하는 과정의 중요한 단서가 된 '왼손잡이'가 과연 유전이냐 하는 의문은 걷어치우고라도 허 생원과 친자로 예상되는 동이가 모두 장돌뱅이라는 사실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의 동일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티브는 김동리의 <역마>에도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김유정과 같은 고향인 봉평에서 오래 살았다는 황일부 노인에 의해 거의 모든 등장 인물, 특히 허 생원과 충줏집이 실제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이해 및 감상 2]

 

 

이 작품은 남녀간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친자 확인(親子確認)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기본 줄기를 이룬다. 이 이야기가 겉과 속을 이루면서 미묘한 운명을 드러내는 과정에 '길'이 등장한다. 그 '길'은 낭만적 정취를 듬뿍 머금은 달밤의 산길이다. 물론, 그 길은 허 생원 일행에게는 생업(生業)의 길목이지만, 괴로운 인생사의 현장이기보다는 삶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세계이다. 온갖 각다귀, 잡배가 우글거리는 장터의 산문적(散文的)인 현실과는 격리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일 듯이 들리는' 운문적(韻文的)인 몽환(夢幻)의 세계이다. 여기에 사랑의 추억과 인연(因緣)의 끈질김이 어우러지면서 한 늙은 장돌뱅이의 애환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묘미는 인간과 동물의 본능적 애욕을 교묘하게 병치(竝置)시킨 구성 방식에 있다. 허 생원이 술집에 들어가 충주집을 탐내고 있을 때, 그의 당나귀는 암놈을 보고 발정(發情)을 한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하는 아이들의 말소리를 허 생원은 자신에 대한 조소처럼 느낀다. 이것만이 아니다.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허 생원은 성 서방네 처녀와 꼭 한번 정을 통한다. 평생 처음이요, 마지막 기회였다. 허 생원이 처녀에게 잉태시킨 것처럼 당나귀는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나귀의 까스러진 갈기, 개진개진한 눈은 허 생원의 외양(外樣)과 흡사하다.

 

이 소설은 세련된 언어와 시적 분위기 속에서 낭만적 정서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궁싯거리다', '칩칩스럽다', '농탕치다' 등의 다채로운 어휘와 함께, 허 생원 일행이 달밤에 걸어가는 장면은 언어 예술의 한 진경(眞境)을 이루고 있다. 그러기에 김동리(金東里)는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고 평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낭만적 필체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파장 무렵의 시골 장터 풍경 묘사, 주인공 허 생원을 닮은 나귀 묘사 등은 뚜렷한 사실성을 지니고 있다.<문원각>

 

 

[이해 및 감상 3]

 

이효석은 산문 속의 이미지 처리에도 능란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성싶다. 이미지라고 하면 대체로 시각적 이미지를 가리키며, 드물게 청각이라든가 촉각 같은 이미지가 있더라도 거의 언제나 한 감각 기관에 국한되는 것이기 쉽다. 그러나 이효석의 경우에 우리는 한 이미지에 두어 가지 감각 기관이 함께 개입되는 예를 빈번히 볼 수 있다. 가령, 달밤이 '신비로운 색체'이외에도 '일종의 독특한 향기'까지 품고 있다는 구절에서 우리는 달밤이라는 시각적 이미지가 부분적으로는 후각적으로도 수용되고 있음을 본다. 또, "돌을 던지면 개금알같이 오드득 깨어질 듯한 맑은 하늘, 물고기 등같이 푸르다"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청각 혹은 촉각을 통해 수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메밀꽃 필 무렵'에서 볼 수 있는 달밤의 메밀밭 이미지는 한꺼번에 우리의 여러 감각 기관에 호소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부분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달밤의 메밀꽃 풍경이므로 기본적으로는 시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효석은 독자들로 하여금 '달의 숨소리'와 나귀의 방울 소리를 듣게 하고, 손으로 달빛을 잡거나 달빛 때문에 숨이 막히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가 하면, 소금맛을 상상하게 하고, 메밀의 붉은 대궁을 향기로 환원하여 맡을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하건대, 이 구절에서 이효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오관을 모두 동원하여 달빛과 메밀꽃을 수용하게 하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독자들이 이 구절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것도 아마 모든 감각 기관을 동원하여 이 구절에 제시된 이미지를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 및 감상 4]

 

1936년 상반기에 '산'과 '들'을 쓴 쓴 이효석이 같은 해 하반기에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단편의 집필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거의 예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편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오랫동안 이효석의 작품 세계에서 잔존하고 있던 좌익 이념이 완전히 몰각된 채 인간, 성, 그리고 자연이 혼연 일체를 이룬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허생원이 성서방네 처녀와 물방앗간에서 인연을 맺던 날 밤이 '꼭 이런 날 밤'이었다고 하며, 이효석이 그려 내는 경치는 달빛이 쏟아지는 메밀밭의 정경이다.

허생원이 무더위에 쫓겨 개울가로 목욕하러 나갔을 때에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었고,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개울가에서 옷을 벗지 못하고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자, 성서방네 처녀가 그 곳에서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서방네 처녀가 무슨 연고로 거기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으나, 혼기를 맞은 그녀가 집안 형편이나 개인적 처지를 한탄하며 심란해하던 중, 달빛 어린 메밀밭 경치에 자극된 센티멘털리즘 때문에 그 곳으로 나왔으리라는 암시는 있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가 별로 없는 가운데 허생원과 처녀 사이에는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 맺어졌고, 이 순간에 인간, 성, 그리고 자연은 혼연 일체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옥, '이효석')

 

 

 

 

[참고 (소설문학에 나타난 한)]

 

소설에 있어서는 개인과 개인의 갈등,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 또는 개인과 국가(혹은 민족) 사이의 갈등의 심도에 따라 한(恨)이 되기도 하고 원(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갈등의 심도가 낮으면 한으로, 심도가 깊으면 원(怨)이 되는 것이다. 또, 갈등의 심도가 깊다 할지라도 원이 복수 의지로 발전하지 않고 종교적 해한(解恨)의 차원에서 극복될 때, 즉 한이나 원이 휴머니즘으로 극복 승화될 때 그것은 화해와 사랑으로 정화된다. 여순 반란 사건을 소재로 한 김동리의 '형제'는 원한이 복수로 발전하지 않고 휴머니즘적 인간의 사랑으로 극복된 좋은 예이다.

 

아무튼, 소설은 시에 있어서보다 인간적 갈등의 심도가 크기 때문에 대부분 원한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타력이나 가학적이 아니고, 자기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 후회하고 희구하고 마음 아파하는 데서 생기는 자한(自恨)이나 회한, 정한이 소설 작품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 김만중의 '구운몽' 등은 자한의 소망을 작품을 통하여 이루어 본 것들이다. 이와 같은 자한, 회한, 정한은 뒤에 김동인의 '배따라기'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으로 이어지며, 우리 나라의 서정주의에 가까운 소설들은 모두 이러한 자한, 회한, 정한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고대 소설에서는 정한보다는 원한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개인적인 원한을 다룬 작품으로는 '운영전', '사씨남정기', '장화홍련전' 등이 있고, 궁중의 원한이 나타난 궁중 소설로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어느 궁녀의 '계축일기'(일명 서궁록), '인현왕후전' 등이 있다.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결한과 해한이 나타난 작품으로는 허균의 '홍길동전'과 작자 미상의 '춘향전'을 들 수 있다. 또 민족의 원과 한을 다룬 '임진록'은 패배한 민족의 역설적인 해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 현대 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광수의 '무정'에도 망국한이 보인다. '무정'은 바로 원한의 소리이다. 일본 헌병에게 잡혀 감옥살이를 하는 아버지에게 차입하여 줄 것을 사기 위하여 박영채는 기생으로 몸을 판다. 그러나 그 몸값을 중개인에게 사취당하고, 대동강에 빠져 자살하려고 한다. 박영채의 자살 기도 동기는 표면적으로는 정절이 깨어진 데 있지만, 실제로는 이형식에 대한 우회적 복수에 있다. 국권 상실로 이한 망국한이 박영채에게 투영된 것으로, 냉혹한 사회와 이형식에 대한 박영채의 원한은 곧 망국한이다. '무정'의 망국한은 채만식, 염상섭을 거쳐 이무영, 심훈, 김유정, 나도향, 김동리, 박경리,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며, 1950년대 이후에는 조국 분단의 한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호철의 '월남한 사람들', 이문구의 '해벽', 김원일의 '노을', 윤흥길의 '장마', 전상국의 '아베의 가족', 한승원의 '안개바다', 조정래의 '인간의 탑', 유재용의 '누님의 초상', 현기영의 '순이 삼촌' 등에 분단의 한, 고향 상실의 한, 동족 상잔의 한 등 분단 시대의 민족의 한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대 소설에서와는 달리, 신소설 이후의 소설에서는 원한이 복수를 통하여 해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원한 감정은 복수 의지로 해원되지 않고 용서와 화해로 풀려 소설 미학으로 수용되고 있다. 또 가학자(원한을 준 사람) 쪽에서 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풀어 주려고 한다. 우리의 현대 소설에서 원한 감정은 휴머니즘으로 극복되고 있으며, 특히 6.25 소설들은 원한 감정을 화해와 용서로 풀어 민족의 동질성을 찾으려 하고 있음은 퍽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순태, 한(恨)>

[출처]|작성자 무경선생